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한국 오는 순간 쫓겨난다는 외국인 TO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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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한국 땅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떠나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한국 땅을 벗어나면 언젠가는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 한국음식이 그리워지기 마련인데요. 하지만, 아무리 한국이 그리워도 다시는 돌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국내의 결혼식도, 장례식도 갈 수 없는 그들! <한국에서 추방된 유명인 TOP 3>에 대해 알아볼게요.

TOP 3 신은미

북한을 너무 사랑해 무려 9번이나 방문한 여자가 있습니다. 애국자가 아닌 애북자 재미교포 신은미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1961년 생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그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평범한 성악과 교수였습니다. 그녀는 재미교포 남편과 재혼을 하면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북한에 9차례 방문하게 되는데요.

9차례나 방문하면서 정이 들어 버린 걸까요?

북한을 여행했던 여행기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를 ‘오마이뉴스’에 투고하기 시작합니다. 북한측은 그런 그녀의 가치를 높게 사 그녀가 방북을 할 때마다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죠.

눈과 귀가 가려진 그녀는 알려진 것과 달리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 따위는 없었다. 북한은 정상국가처럼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북한에서 인권을 유린당했던 탈북자단체를 비롯해 각종 반공 성향 단체에서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는 2014년 토크콘서트에서 그들을 향해 ‘진실을 왜곡하여 돈을 버는 파렴치한 집단, 탈북자 80~90%는 조국 북녘 땅이 받아준다면 다시 돌아가고싶다는 말을 한다.’는 발언마저 서슴치 않았는데요.

결국 그 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토크 콘서트 중 내용에 격분한 고등학생이 미리 준비한 폭발물이 들은 냄비에 불을 붙여 던져버린 건데요.

이런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논란은 짙어지고, 그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강제출국을 당하게 되고, 5년간 입국 금지처분을 받게 되죠. 그녀의 어머니조차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연을 끊기까지 했는데요.

그녀는 본인을 소재로 한 영화 앨리스 죽이기를 홍보하면서 본인은 조중동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추방당한 기간 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아직도 한국을 폄하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선동을 계속해서 일삼는 모습을 보이는 중입니다.

입국 금지가 해제되고, 남녘 땅과 북녘 땅을 한꺼번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그녀! 어머니에게서는 용서를 받았지만, 과연 고향의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TOP 2. 고 젠카

우리나라의 북녘땅을 너무나 사랑했던 신은미가 있다면, 남녘 땅을 너무나 사랑했던 여자도 있습니다. 본명 오승일. 일본에서 얻은 이름 고 젠카가 그 주인공입니다.

1983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오선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클럽 뉴태양에서 한복을 입고 접대를 하는 호스티스로써 일을 하게 되는데요. 이 때 일본인 사업가를 접대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동거를 하게 되죠.

그녀는 어학원에서 비서 일을 하면서 문제의 책을 출판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제목하야 ‘치맛바람’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황당한데요. “한국 여성은 대부분이 술집여성 출신으로 돈 많은 일본 남자를 잡는게 목표.”라고 주장하는데요.

한국을 까는 내용으로 성공한 고 젠카는 우익들의 대변인으로 노선을 갈아탑니다. 고 젠카는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 ‘한국 재정복.’, ‘고 젠카의 혐한론’ 등 혐한저서를 쓰기 시작하는데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쓴 책은 무려 50여권!

유명세를 얻어 타쿠쇼쿠대학의 교수 자리까지 꿰찬 그녀는 “창씨 개명은 한국인이 원해서 한 것이다.”, “위안부는 자발적이었다.” 등의 자극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한국을 혐오하는 내용을 가르치는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7년, 고 젠카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으나 입국을 거부당하게 되고, 교섭을 통해 일시적인 귀국을 인정받았지만, 이후로는 한국의 안전, 질서, 풍속 등을 해칠 염려가 있다며 입국 금지 명단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비인권국가의 일면이라며 비판을 내뱉었지만, 한국인을 비하하고 한국인의 인권을 무시한 그녀야 말로 진정한 내.로.남.불.

아직도 그녀는 한국에 대한 거짓된 정보를 일본에 팔아먹으며 살고 있는데요. “세월호 사태는 극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본모습을 보여준 일.” “한국은 일본의 스토커다.” 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TOP 1. 스티브 유

‘한국을 대표하는 댄스 가수.’, ‘아름다운 청년’ 등 각종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던 연예인이 있습니다. 이제는 스티븐 유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유승준인데요.

미국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채 혼자 가수의 꿈을 키워오던 그는 97년 만 20세의 나이로 한국 가요계에 혜성같이 나타났습니다.

‘가위’, ‘나나나’, ‘열정’, ‘찾길 바래’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명곡들을 남기며 노래, 춤 뿐만 아니라 연기, 예능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그는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것으로 보였죠.

그는 병역 이행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며 아름다운 쳥넌의 이미지를 이어나가던 그는, 2001년 말 입영을 3개월 미루고는 귀국보증제도를 이용해 공연을 마치고 오겠다며 출국했습니다.

대중들은 공항까지 나가서 그를 환송해주는 등 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베풀었지만 그는 공연을 마친 후 가족에게 인사만 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않고 대한민국 국적 포기 신청 의사를 밝혔습니다.

“2년 반 동안의 공익근무를 하고 나면 제 나이가 거의 서른이 됩니다. 또 댄스가수의 생명이 짧은 걸 제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스티브 유의 선택은 대중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말았죠.

병무청은 논의를 거쳐 법무부에 입국금지 조치를 바로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져 영구적인 입국금지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모두 무산되기에 이르자 2015년 5월 19일. 그는 아프리카 TV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 사과방송을 진행했는데요.

그는 ‘다시 병역을 마친 후 돌아오고 싶다는 문의를 보냈다’고 말했지만 병무청에서는 ‘작년까지 입대가 가능했지만 입대 문의는 없었다.’ 며 그 간의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고, 대중들의 반응도 냉담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법원의 문을 두드린 결과. 2020년 결국 비자발급 소송에서 최종 승소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는 비자 발급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판결이었을 뿐 비자를 내주라는 판결은 아니었고, 입국 거부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2020년 12월 유승준 원천방지 법이 발의되자 그는 다시 자신의 채널에서 입장을 발표하는데요. 결국 이후로 그에 대해 우호적인 대중마저 대부분이 돌아서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죠.

그가 21년 다시 한 번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자 결국 보다 못한 병무청장이 직접 나서서 그를 병역기피자로 못 박았습니다.

모종화 병무청장은 그는 다른 국적포기 병역기피자와는 차원이 다르고, 그는 단연코 병역면제자가 아닌 병역기피자다. 라고 이야기하며 그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처벌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강경한 태도로 그에 대한 논란을 일축시켰죠.

세계 인권 선언, 대한민국 헌법 상으로 자국민을 입국 금지시키는 것은 불법으로, 연쇄살인자라고 해도 입국 금지 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들이 입국을 금지당한 것은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버리고 외국인을 택했기 때문인데요.

그들이 스스로 포기한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어떤 유려한 변명 백마디보다도 진심어린 사과 한 마디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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