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낼수 있었는데 철천지 원수가 된 연예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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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우정을 쌓아온 절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사소한 오해, 트러블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남보다 못한 사이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척을 지는 것을 넘어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등을 돌리다 못해 원수가 된 연예인들을 알아보겠습니다.

김수희-신신애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제치며 혜성처럼 등장한 발라드곡 ‘애모’를 통해 각종 가요계 상을 휩쓴 가수 김수희. 1992년에는 ‘희레코드’라는 연예 기획사를 설립하여 편승엽, 쎄쎄쎄, 태영이 등의 후배 가수를 양성하는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바 있는데요. 


한창 기획사 대표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3년 드라마 ‘희망’에서 뽕짝을 천 곡 넘게 통달한 캐릭터 ‘뽕짝네’로 열연한 배우 신신애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김수희는 당시 최고 수준인 계약금 200만 원으로 신신애에게 가수 데뷔를 제안, 신신애는 조연급 배우에서 시대불문 지금까지 사랑받는 희대의 히트곡 ‘세상은 요지경’을 발표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신신애가 벌어들인 음반 수익금은 0원이었다는데요. 당시 한국 가요계에서는 음반 수익금 100%를 대표가 가지는 게 관례였기에 김수희 역시 관례대로 했고, 배우 출신의 신신애는 이런 관례를 몰랐기에 그야말로 ‘초대박’난 세상은 요지경의 음반 수익금을 받지 못해 분노를 터뜨렸다고 합니다. 이후 충분한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두 사람. 


신신애는 가요계 관례를 이해하고 음반 수익금은 받지 않겠다는 내용에 합의했으며 김수희는 그래도 자신이 발굴하고 스카웃한 후배이기에 공연 및 행사비를 2배가량 올려주며 음반 수익금으로 인한 충돌은 해소되는 듯 했죠. 그러나 세상은 요지경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고, 음반 수익금 역시 천정부지로 뛰어오르자 신신애는 합의 내용에 다시 한번 부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93년 함께 출연한 KBS 가요 프로그램 생방송에서 신신애가 MC에게 김수희를 비난, 폭로하면서 다음날 김수희가 신신애를 계약 해지함과 동시에 모든 수익금을 신신애에게 넘겨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소속사에서 퇴출시켰다고 하는데요. 당시만 해도 드문 여성 연예기획사 대표와 여배우의 훈훈한 협업은 결국 절연으로 끝났네요.

김태원-이승철

1985년에 결성된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부활’의 리더이자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 작곡가로 저명했던 김태원과 가수 이승철 역시 철천지 원수가 된 사이로 유명합니다. 

80년대 중반 놀라운 기타 실력으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위치에 있던 김태원은 밴드 부활을 결성, 당시 듣보 신인이었던 이승철을 보컬로 기용한 뒤 거의 모든 곡을 작사, 작곡하여 부활 1집을 발매했고 2집까지 연타석 홈런을 치게 됐죠. 


그러나 록밴드 특성상 모든 주목은 보컬인 이승철에게 향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제조한 김태원은 상대적으로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부터 두 사람의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어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며 행사 무대에도 서고 싶어한 이승철과 달리 김태원은 아티스트라는 이유로 나이트클럽 등의 행사를 거부하며 서로를 향한 불평 불만은 극에 달했죠. 더욱이 2집 인기가 최상으로 치닫을 당시 김태원이 대마초로 구속되며 위기를 맞은 부활. 


밴드 활동이 중단되자 이승철은 부활을 탈퇴, 이후 김태원과 상의도 없이 김태원이 작사작곡한 ‘회상3’를 자신의 솔로 앨범에 ‘마지막 콘서트’라는 제목으로 수록하는 간 큰 만행을 저질렀는데요. 그러나 ‘희야, ‘소녀시대’ 등 솔로 1집이 대박나며 이승철과 김태원은 상반된 위치에 놓이게 됐죠. 


하지만 이승철은 솔로 2집 성공 이후 90년대 중반 역시 대마초로 구속되는 부침을 겪게 됐는데요. 5년간의 방송 정지 후 1998년 다시 복귀했지만, 인기는 예전같지 않았고 서서히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기 시작했죠. 


그렇게 부활의 명성이 무색하게도 서로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가요계에서 사라지던 두 사람은 2001년 김태원의 접근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김태원이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명곡을 만들어 부활을 다시 결성, 또 다시 히트를 치며 인기를 누렸지만 역시나 행사에 대한 의견 차이로 다투다 이승철 혼자 MR로 지역 행사를 돌며 행사비를 쓸어 모았다는데요. 


이미 이승철의 단독 행사로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이승철이 콘서트 실황 DVD를 발매하며 김태원에게 한 마디 언질도 없이 ‘이승철 with 부활’이라는 이름을 사용, 크게 싸운 뒤 이승철이 또 한 번 부활을 탈퇴하며 갈라지게 됐다고 하네요. 추후 솔로 앨범의 성공을 발판 삼아 인기 가수로 자리매김, 제2의 전성기를 누린 이승철과 달리 김태원은 2008년 예능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암흑 시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싸이-김장훈

친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철천지 원수가 된 연예인 마지막, 바로 싸이와 김장훈입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획기적인 공연 기획으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자아내던 김장훈이 싸이 콘서트를 직접 연출하며 소위 대박을 쳤고, 이듬해 싸이는 김장훈의 연출 방법을 차용하여 공연을 직접 연출한 바 있는데요. 이에 김장훈은 “표절이다”, 싸이는 “선배에게 배운 것이다”라며 두 사람의 논쟁이 불거졌지만, 김장훈의 표절이 인정되지 않으면서 서로 불편한 사이로 남게 됐죠. 


하지만 2006년 싸이의 병역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김장훈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싸이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김장훈에게 선물하며 연예계 대표 절친 사이가 되었는데요. 싸이 전역 후에는 3년간 공동 연출 콘서트 ‘완타치’로 전국 투어를 돌며 30만 이상의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죠. 


그러나 2012년 MBC ‘놀러와’에 출연한 김장훈은 애초에 듀엣으로 시작한 게 아니니 가장 잘 된 상태에서 완타치 콘서트를 마감하는 게 맞다고 결별을 통보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한 두 사람. 


하지만 2012년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며 다시 멀어지게 됐는데요. 2012년 9월 무렵 김장훈은 3년간 콘서트 공동 연출자였던 싸이에게 2004년 콘서트를 도용당했다며 자신의 SNS에 게재, 팬들과 댓글로 싸이에 관한 뒷담화 등을 시전하며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이후에도 국내외 뜨거운 반응을 자아내며 승승장구하던 싸이와 달리 김장훈은 개인 콘서트,3D뮤비 등 절치부심하여 진행한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쫄딱 망하면서 싸이에게 소위 ‘열폭’한다는 대중들의 싸늘한 반응까지 더해져 자살을 시도하는 극한 상황에 치닫기도 했죠.


이후 2015년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김장훈은 “지난해 싸이한테 전화해서 오해나 앙금을 내려놓고 편하게 풀자고 했다. 완벽하게 화해했다”고 해명했으나, 싸이는 이에 관한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두 사람 본인이 아닌 이상 정확히 알 순 없을 것 같네요.


한때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서로 믿고 의지하는 등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두 사람. 주어진 상황과 의견차를 좁이지 못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모습을 보니 인간관계에 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