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문화재들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도 약탈해갔죠. 게다가 진행한 복원 공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원래 모습을 훼손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일본이 엉터리로 복원한 한국 문화재 TOP3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위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인 다보탑. 한국의 다른 어떤 석탑과도 닮지 않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목조 건물의 복잡한 구조를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해 아름답게 표현했는데요 국권 상실의 혼란기 속에서 일제의 복원을 명분으로 한 수탈로 인해 원형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일제는 1918~1919년 1차 수리 당시, 불국사 유적 중 난간과 계단 등을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돌연 계획을 수정하여 제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일제는 1918년~1925년까지 7년동안 대웅전과 다보탑을 보수했는데요. 다보탑을 완전히 해체 후 복원하는 작업을 했지만 이에 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아 다보탑의 원형 및 진행사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는데요. 탑의 원래 용도를 생각한다면 사리장치가 없어진 것은 한마디로 말해 속이 빈 탑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다보탑의 사자상은 원래 동서남북 4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하나뿐이 남아있지 않은데요, 1925년 당시에는 사자 4마리 중 2마리가 남아있었고 원래 수탈을 위해 둘 다 다보탑 기단에서 끌어내려졌으나 한 마리는 얼굴 부분이 훼손돼있어 극락전 앞에 방치하고 상태좋은 사자상만 훔쳐갔다고 합니다.  

없어진 사자상 중 1개는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인데요. 나머지 두 사자상은 동경 모 요리점에 팔려갔다는 후문이 있으며 석굴암 내 오층석탑을 가져간 일본인 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가져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다보탑 뿐만 아니라 불국사도 총독부에 의해 1923년부터 1936년까지 정비됐지만 수리 이전의 조사, 연구가 불충분했고, 그로 인해 석단  과 화랑지 등에 많은 변형이 초래됐습니다.

광복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1970년에서 1973년 6월까지 3년 6개월간 진행됐는데요, 우경루를 복원하지 않아 불국사는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잃었으며 백운교와 연화교 밑의 연못도 발굴하지 않고 묻어버려 문화유산을 제대로 복원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2위 미륵사지석탑

미륵사는 10만 평에 이르는 너른 절터에 35년에 걸쳐 건설된 백제 최대의 사찰인데요. 그 안에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동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합니다.


미륵사지 석탑도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역사에 따라 부침을 겪었는데요. 1756년에 간행한 신문인 금마지는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높이가 10여장(丈)이며, 동방에서 가장 높은 석탑으로 속설에 전한다”며 “벼락 친 곳 서쪽 반은 퇴락했다. 흔들렸음에도 큰 탑은 그 후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고 기록했는데요.

이후에도 별다른 보수 없이 계속 방치되었다가 1915년에 벼락에 맞아 또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서탑은 원래 스스로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지만 인위적인 도굴로 인해 더욱 심하게 반파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6층 일부만 남은 상태에서 석재들이 일부 무너져 내리자 일제는 보수공사를 한다며 미륵사지 석탑에 무려 185t에 이르는 콘크리트를 들이부었는데요, 콘크리트는 탄산칼슘 등의 성분으로 인해 백화현상과 풍화작용을 촉진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콘크리트는 첨단 자재로 여겨졌기에 일본도 자기네 문화재에 사용했다지만 임시 조치로 제대로 보수하지도 않아 콘크리트 땜질 후에도 탑은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게다가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아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미륵사지 석탑은 그저 흉측한 몰골의 돌덩어리로 둔갑했는데요, 이후 석탑은 약 80년을 콘크리트에 엉겨 붙은 채 버텼습니다.

1300년이 흐르면서 석탑이 노후로 인해 2001년부터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해체 수리 공사에 들어갔는데요. 일본이 덧발라놓은 콘크리트의 두께가 최대 4m에 달했고 무게도 185t에 달해서 복원팀은 치과 치석 제거용 기구로 콘크리트 가루 한알 한알을 세밀하게 벗겨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은 백제시대 원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핵심 원칙을 세워 화강암 원석을 다듬을 때에도 전통 방식대로 일일이 정으로 쪼는 방식을 택했다고 합니다. 

2009년 1월, 석탑 해체조사 과정 중에는 1층 내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돼 이를 통해 석탑의 건립 시기(639년), 미륵사 창건의 배경과 발원자 등도 밝혀질 수 있었는데요, 이렇게 꼼꼼하게 작업했기 때문에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 시간인 20년이 걸렸으며 2018년에야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수리·정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1위 석굴암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불교 문화재의 걸작으로 꼽히는 석굴암. 일제는 일제강점기 시절, 문화 사업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석굴암은 1909년에 지나가던 우체부가 발견한 것’이라고 홍보했는데요, 조선후기 기록만 보더라도 상당수가 석굴암을 인지하고 방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석굴암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잘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자료에 따르면 ”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였습니다. 


1909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석굴암을 해체 후 이전하려 했지만 돌들의 무게가 엄청나 옮길 수가 없었고 조선에 있어도 일본 정부의 재산인 것은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1913년 부터 1923년까지 세 차례 전면적인 수리를 했는데요, 새로 지은 콘크리트 구조물에 조각상을 붙이는 형식으로 복원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석굴암이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어 습하자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차단한답시고 석굴 밖에 외벽을 세웠고 외벽과 석굴 사이에 콘크리트를 채웠으며 땅속에 흐르는 샘물을 관으로 빼버렸습니다. 때문에 원래 바닥에만 맺히던 이슬이 바닥 온도가 상승하면서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요, 내부벽과 불상 표면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나타났고 시멘트가 화강암을 손상시키고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비가 새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 실무진들은 대형 고대 석조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을 뿐더러 한국의 석공 장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이들을 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는데요, 복원공사를 하며 해체과정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고 사진조차도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다 조립하지 못한 석굴암 석재들이 남아 방치되기도 했는데요, 어느지점에 있던 석재라는 메모조차 없습니다. 참고할 만한 사료가 없어서 박정희 정권 시절, 다시 보수할 때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돔에 철근 콘크리트돔을 하나 더 얹어 씌웠다고 합니다. 


그 결과 내부 습기가 더더욱 심각해져서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계속 가동함으로써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요. 참배객이 직접 석굴 안으로 들어와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24시간 365일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완전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나마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큼은 석굴암 내부 출입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천 년을 버틴 석굴암이 한 순간의 보수공사로 망가져버린 것이 안타깝네요. 


유적이 이미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에 일제가 아니었으면 아예 붕괴됐을 거라는 말도 있는데요, 하지만 애초에 일제강점기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방치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복원한 이유도 ‘문명국인 일본이 야만의 식민지 조선에 시혜를 베푼 것’으로 홍보하기 위해서이며 경주의 유적을 부각함으로써 점령을 당한 현실에 대한 회한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라는데요, 경주를 기생의 도시로 홍보하기까지 했다니 좋은 의도로 복원을 한 것이 아니라 음험한 이유가 다 있었네요.